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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은 12.12 군사반란과 계엄령 선언과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 이후 광주민주화 운동, 6월 민주화 운동으로 민주화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간단한 정리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 1979년 10월 26일
10년 이상 권력을 잡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암살은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에서 열린 만찬 중에 일어났습니다.
전두환 군사반란 / 1979년 12월 12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의 여파로, 군대와 정치권 내부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은 군사 반란을 이끌었고, 정부를 장악했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혼란과 박정희 대통령의 명확한 후계자의 부재를 이용했습니다.
계엄령 선포 / 1979년 12월 13일
군사반란 이후, 전두환은 1979년 12월 13일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이 움직임은 헌법의 정지, 국회의 해산, 그리고 정치적인 반대자들의 체포를 동반했습니다.
전두환은 그의 권력을 군대와 정부 내에서 공고히 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 1980년 5월
군정에 반대하는 시위들이 광주에서 발발하여 군대에 의한 잔인한 진압으로 이어졌습니다.
광주에서의 사건들은 대중의 감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권력의 공식화 / 1980-1981
전두환은 최규하의 뒤를 이어 1980년에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통령직은 권위주의적인 통치, 검열, 그리고 정치적인 억압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전두환의 군사독재는 1987년까지 계속되었는데, 그때 일련의 민주화 운동과 국제적인 압력이 군사독재를 멈추게 했습니다. 민주주의로의 전환은 결국 1988년 노태우를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결과를 낳았고, 전두환 대통령 임기의 끝을 알렸습니다.
6월 민주화 운동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알려진 일련의 민주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정부가 이전의 헌법 개혁 없이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는 의도를 발표함으로써 촉발되었습니다.
6월 민주화 운동은 각계각층의 학생, 지식인, 종교단체, 시민들에 의해 주도된 광범위한 시위, 파업을 포함했습니다.
시위 참가자들은 개헌과 대통령 직선제, 전두환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통치 종식 등을 요구했습니다.
대통령 직선제
시위가 격화되고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는 상황에서 변화가 있었습니다.
1987년 6월, 전두환은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적인 정치 체제의 수립을 포함한 헌법 개혁의 시행에 동의했습니다.
헌법개혁
6월 민주화 운동의 요구에 따라 정부는 민주적 선거를 위한 길을 닦기 위해 헌법 개정에 착수했습니다.
개정안에는 대통령을 국민투표로 직접 선출하고 권한을 늘린 국회를 설치하는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대한민국은 1987년 12월에 헌법 개혁의 결과로 첫 대통령 직선제를 실시했습니다.
전직 장군이자 전두환의 가까운 동료인 노태우가 선거에서 이겼습니다.
선거 이후 상당한 정치적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군사독재 초기의 특징이었던 권위주의적 통치가 보다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정치체제로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정당이 출현하고 다양한 사회집단의 정치참여가 증가하면서 정치지형이 다양해졌습니다.
1987년의 사건들과 그 후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전환점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누리는 민주적 통치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평화적 시위를 통해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국민의 힘을 보여주었고, 보다 포용적이고 민주적인 정치체제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